활을 다시 잡고 싶다.
활을 쏘고 싶다.
기온이 낮아지고 힘들어질수록 그때 그 추억들이 떠오르고 그러면 활이 잡고싶어진다. 무릇 남자라면 가을을 탄다고들 한다. 굳이 가을이어서라기보단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관계가 시작되었기 때문이고, 그녀의 생일은 그 때 즈음에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베리아에서 저온의 건조한 바람이 불어오며 겨울 내음을 가져오기 시작하면, 난 그 때를 떠올린다.
활과 그 추억. 돌이켜보면
즐거웠노라 할 수 있는 것보단 우울하더라 할 것이 많지만 그땐 뭐가 그리 좋았는지 다른 모든 것은 제끼고 오로지 그 둘만이 내 생의 전부였었다. 그 중 고귀했던 것은 재수라는 속세에 얽매인, 출세하기 위한 천박한 수단에 치여 내 중심에서 밀려난지 오래됐고, 그 중 뜨거웠던 것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길 위에 남아있다. 아니, 가만히 있지 않고 나를 쫓아오며 너는 감당할 자신이 안됐었노라, 너는 이기적이었노라 외치며 날 괴롭히고 있다.
난 아직까지도 대인관계에 미숙하다. 그 일을 어찌 풀었어야했을까?
난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내 자신도 상처를 받는다.
내가 준 그 상처에 치여, 내가 받은 그 상처가 아려 보듬어 줄 사람을 찾았고, 내 상처를 보듬던 그 영혼은 나를 떠난지 오래다. 난 그 영혼과 마주하기에 경박했고, 그는 나를 좇아 같이 어두워져갔다. 그리고 그 관계가 끝난 지금까지도 난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
한 순의 화살을 궁대에 끼우고 사대에 올라 백보 앞의 과녁과 고즈넉한 숲 속 나무들의 선선한 울림을 듣다보면 오직 나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듯한 고독한 행복을 느낀다. 오늬를 잡고 시를 빼어 가만히 살을 먹이는 그 과정에서 난 경건함을 느낀다. 과녁을 바라보고 만작을 하며 궁체를 다지고, 유전의 팽팽함 긴장감을 맛보며 과녁에 집중한다. 발시. 발시는 그 긴장감을 일시에 흩어버리고 자연적인 상태로 돌아오게 만들며, 쏜살은 시원하게 하늘을 가른다. 관중? 아무래도 상관없다. 관중에서 오는 즐거움은 내 집중에 대한 확인에 불과하다. 난 인위적임을 일시에 망가뜨리고 자연 상태로 돌아오는 그 발시의 순간에서 환희를 느낀다. 그리고 이는 허무함으로 이어지며 또 다른 고독을 맛볼 기반이 되어준다.
활과 에로스. 그것은 그만큼이나 상반된 것이다. 숭고한 자연의 고독감을 느끼게 해주는 활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믿음과 정. 그리스·로마 신화에서의 사랑의 신이 활로써 사랑을 이어줌은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난 그 패러독스의 미묘한 긴장 속에서 엑스터시를 느꼈었고, 이는 겨울바람내음에 추억으로 깃들어버렸다.
그리고 저 멀리 아라사의 상쾌한 바람이 내려올 때, 난 다시 활을 잡고 싶다. 다만, 이번에는 나 혼자 보다 큰 고독을 느끼며, 자연 속에서, 해방감을 맛보고 싶다.